[김옥조 칼럼]감시받는 시대의 이중성

등록일자 2023-04-18 14:44:01
▲김옥조 KBC 선임기자
미국측의 도감청 행위가 또 다시 드러나면서 전 세계가 떠들썩합니다.

이번에 언론에 폭로된 도감청의 대상은 적국은 물론 우방국과 동맹국을 가리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줍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온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아마도 실제로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오랜 기간 광범위하게 다양한 정보 수집을 위해 이러한 도감청 행위가 이뤄져 왔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나 아닌 상대를 몰래 엿보고 엿듣고 뒤를 밟는 행위는 매우 큰 잘못입니다.

동의 없이 사적으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녹취하는 모든 과정이 엄연히 불법 행위입니다.

그래서 결코 용인되어서도 안되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 이 시대에 주변을 돌아보면 온통 감시망에 둘러싸여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도심 곳곳, 거리마다 골목마다 카메라 천지입니다.

고속도로에도, 공원 입구에도, 그리고 하늘에도 감시의 눈은 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촘촘한 감시망 속에 살고 있는 게 현실인 것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이 이 같은 상황을 만들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누구를 위해 ‘감시’를 하는 것인가 입니다.

과연 누가 이익을 보게 되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먼저 생각해보면 당연히 감시를 시도하는 쪽이 무엇인가 이익을 얻기 위한 행위일 겁니다.

반대로 감시를 당하는 쪽은 결과적으로 유·무형의 피해나 손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인권침해와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불러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미국의 사례처럼 국가의 단위로 확대되면 그것은 작은 피해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국익과 국민의 보호, 나아가 국가의 존폐위기까지 예상해 보게 되는 엄청난 사건이 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주권국가로서 당당히 항의하고 재발방지를 촉구해야 마땅하다는 국민여론에 무게가 실리는 것입니다.

정부, 즉 국가차원의 감시는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영토를 수호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공의 이익을 위해 법적인 제도장치를 만들어 설치하는 감시 장비나 시설은 사회 안전망의 역할을 합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순기능입니다.

이제 내가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24시간의 행적이 고스란히 추적되고 기록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각각의 입장에 따라 ‘감시’이기도 하고, ‘보호’이기도 합니다.

둘 다 공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불편하고 기분 나쁘더라도 마땅히 이해하고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일상생활 터전 곳곳에 설치된 CC-TV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카메라, 그리고 휴대폰은 개인과 대중의 모든 일상을 쫓고 기록하여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사회의 안전과 편리, 경제성을 전제로 할 때 허용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CC-TV에 찍히는 나의 입장에서는 ‘감시’받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설치한 측의 입장은 잠재적 범죄로부터 상대를 ‘보호’해준다는 측면이 강할 것입니다.

‘감시’냐, ‘보호’냐란 서로 대립되는 두 입장을 지닌 사회적 시스템을 우리는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엿보기’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의 풍속도 ‘단오풍정’에는 그 시대의 엿보기 풍속이 담겼습니다.

여인들이 냇가에서 머리감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는 동자승을 그려 놓았습니다.

다른 풍속화나 춘화 속에도 여속을 훔쳐보는 광경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갓 결혼한 신랑신부의 신방 창지문에 구멍을 뚫고 훔쳐봤던 풍속이 전해 내려왔던 것도 기성세대들은 기억할 겁니다.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확인됩니다.

이것들은 지금의 시각에선 풍속은 풍속일 뿐입니다.

이 시대에 함부로 훔쳐보기를 했다간 그야말로 큰 일 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24시간 카메라에 일상이 찍히면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아침 출근길부터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촬영됩니다.

집에서 나가면 현관 복도를 시작으로 엘리베이터 안, 주차장 구석구석, 출구, 이면도로, 어린이 보호구역, 상가용 등 사방팔방에 카메라가 있습니다.

또 내 차는 물론 앞차와 뒷차 블랙박스 카메라, 속도·신호위반 카메라, 정보수집 카메라 등 수 백 개의 카메라 앞을 스쳐 일터에 도착합니다.

회사에서도 곳곳에 CC-TV를 머리에 이고 함께 일상을 보내게 됩니다.

이뿐 아닙니다. 내가 가진 핸드폰은 나의 위치와 시간, 동선을 감시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대인은 잠자는 순간에도 감시 아닌 감시를 받는다는 걸 벗어날 수 없는 지경입니다.

몸가짐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말 숨 막히고 끔찍한 상황이 우리의 일상 일부라는 겁니다.

‘엿보기’나 ‘엿듣기’는 인간이 가진 호기심의 본성에서 출발할 것입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 알지 못한 것, 상대만이 가진 것을 알고 싶은 궁금증에서 자꾸만 남의 것에 눈과 귀를 여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그치지 않고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면 공익이 깨지기 때문에 피해자가 생기고 결국 범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해서도, 용인해서도 인되는 것입니다.

공공의 안녕과 이익이 우선이냐, 사생활 보호가 먼저냐를 따지기엔 감시망이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미국측의 행위는 국민 감정상 용납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동맹국이라도 주권국가로서 당당하고 강력하게 항의하고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내야 합니다.

화난 국민의 마음을 정부가 다독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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